물론 이들 모두 중요한 인물이지만, 전 과감히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꼽겠습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빌 게이츠와 달리 스티브 잡스는 고아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드라마틱한 인물입니다. 애플 아이폰으로 디지털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스티브 잡스의 인생을 되짚어봤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무엇이 그들을 디지털리더로 만들었나>에서 발췌했습니다.
1955년 2월24일 탄생
고아였던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가족에 입양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가난하지만 양부모의 사랑은 극진했고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머리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1967년 컴퓨터와 첫만남
hp 공장을 견학갔다가 컴퓨터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컴퓨터가 갖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느 아이 같으면 포기를 할텐데, 어린 잡스는 hp 창업자인 윌리엄 휴렛에게 전화를 걸어 공부하는 데 필요하니 부품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휴렛은 이 아이의 배짱이 맘에 들어 부품을 보내주는 한편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선사했다.
1969년 단짝 스티브 위즈니악과 운명적 만남
13살의 잡스와 18살의 우즈는 5살의 나이 차이에도 금세 친해졌다. 당시 우즈는 꽤 알려진 전자공학도였다. “그 나이에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잡스는 우즈의 실력에 반했다. 우즈도 “잡스가 나이는 어리지만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고 치켜세웠다.

1976년 애플 I 개발
스탠포드 대학의 '자작(自作) 컴퓨터' 모임이었던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회원들은 스티브 위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를 ‘두 스티브’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호흡은 척척 맞았다. 최초의 애플은 잡스의 창고에서 탄생했다. 키보드, 케이스, 메모리, 전원공급기가 없는 인쇄회로 기판에 불과했지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게임을 즐기고, 베이직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었다.
‘애플 I’은 1976년 4월 홈브루 컴퓨터 클럽 회원들 앞에 공식적으로 선보였다. 같은 해 7월, 잡스는 캘리포니아 최초의 컴퓨터 판매점 운영자와 계약을 맺고 50대를 공급했고,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는 우편판매로 대당 666달러를 받고 150대나 팔았다.

1977년 애플컴퓨터 출범
쿠퍼티노 시에 번듯한 사무실을 차린 잡스와 우즈는 각각 아타리와 hp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잡스는 22살, 우즈는 27살이었다. 그해 4월16일, 제1회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전시회를 통해 애플 I의 후속작인 애플 II가 선보였다.

1978년 애플 II 대박
애플 II의 성공으로 애플컴퓨터는 불과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 2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잡스는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뽑은 ‘세계 400대 거물’에 가장 어린 나이로 이름을 올렸다.
1979년 GUI와 첫만남
잡스는 어느 날, 제록스의 팔로알토연구소(PARC)를 찾았다가 컴퓨터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마우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마우스를 이용하면 더 이상 키보드로 복잡한 명령을 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여겼고, 그 결과 GUI의 매킨토시가 탄생한 것이다. 나중에 MS가 윈도 95를 내놓았을 때, 잡스는 빌 게이츠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비난했지만 빌이 “애플, 너도 모방했으면서 왜 나를 공격하느냐”고 맞받아친 이유도 결국은 마우스의 원조가 제록스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위기 맞은 애플
IBM이 PC를 만들면서 애플은 위기를 맞는다. 플의 매출액은 1980년 1억1천700만달러, 1981년 3억3천500만달러, 82년 5억8천300만달러, 83년에는 9억8천500만달러로 매년 2배씩 성장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낮아졌다. 83년 점유율은 애플과 IBM이 각각 21%, 30%였지만 84년 들어 IBM은 35%로 오른 반면 애플은 19%로 떨어졌다.
1984년 매킨토시로 반격
슈퍼볼 경기의 광고를 통해 반격을 노린다. 광고는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지도자의 말을 무심히 듣고 있는 노동자들 사이로 한 여성이 나타나 해머로 스크린을 부수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도자는 IBM을, 노동자는 소비자를, 그리고 주인공인 여성은 애플을 상징했다. 거인 IBM을 무너뜨리겠다는 잡스의 야심이 엿보이는 대단히 독특한 광고였지만...

1985년 9월17일 쓸쓸한 퇴장
이사회는 애플 III와 리자의 실패, 매킨토시의 판매부진을 이유로 그를 쫓아냈다. 9년 전 혜성처럼 나타났던 잡스는 그렇게 한순간 무대 밖으로 떠밀러 나가고 말았다. 이후 잡스는 넥스트스탭으로 재기를 노린다. 88년 10월 첫 제품을 내놓았지만, ‘잡스의 부활’이라는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소비자들의 반응은 싱거웠다.
1986년 픽사 인수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영화사에서 슈퍼컴퓨팅 부분이 필요해 세웠던 픽사를 인수했다. 잡스는 픽사가 <토이스토리>의 오리지널 버전인 <틴토이>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하자 93년 넥스트스탭을 정리하고 만화영화에 ‘올인’했다. 그리고 95년 토이스토리가 대박을 터트리며 잡스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1996년 애플 복귀
92년 주당 60달러에 이르던 주식은 다른 컴퓨터 제조사의 주가가 3배 가까이 치솟던 96년 말 오히려 17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애플은 결국 스티브 잡스에게 SOS를 보냈다. 치욕을 맛본지 11년 만인 1996년 말, 잡스는 41살의 나이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애플에 돌아왔다.
1998년 애플 아이맥 출시
‘아이맥’은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와 부드러운 곡선으로 디자인의 혁명을 일으켰다. 출시 6주 만에 무려 27만8천 대가 팔리는 기록도 세웠다. 「비즈니스위크」는 아이맥을 98년 최우수 제품으로 뽑으면서 “아이맥의 반투명 컬러 케이스는 천편일률적인 PC의 색깔로부터 대담한 이탈을 시도했다”고 치켜세웠다.

1999년 7월 아이북 출시
애플 아이맥의 선전에 힙입은 잡스는 99년 7월 노트북 ‘아이북’을 내놓았고 언론들은 “애플 신화가 부활한다”는 기사를 실어 날랐다.

2000년 자존심 회복
애플 이사회는 잡스에게 9천만 달러의 보너스와 함께 전용 제트기를 선물했다. 연봉 1달러에 다 쓰러져 가는 애플의 지휘봉을 다시 잡은 잡스가 ‘썩은 사과’를 ‘싱싱한 사과’로 부활시킨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애플은 99회계 연도에 6억 달러의 흑자를 냈고 주가는 100달러를 웃돌았다.
2001년 아이팟 출시
잡스는 2001년 아이팟 MP3 플레이어를 앞세운 음악 시장에 뛰어들었다. 아이팟은 2001년 출시 후 단기간에 세계 MP3 플레이어 시장을 평정했다.

2005년 1월 맥미니 출시
2005년 1월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에서 잡스는 기조연설을 마친 뒤 ‘맥미니’(MAC mini)를 선보였다. 깜찍한 디자인의 맥미니는 컴퓨터라기보다는 AV 기기에 가깝다.
2005년 6월 12일 스탠포드 대학 연설
잡스는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에 참석해 인기 연예인 못지않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사실 잡스는 1년 전 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의사들이 “불치의 암이 확실하다”며 “3개월에서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내렸지만 목으로 내시경을 집어넣어 위와 창자를 거쳐 췌장의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정밀검사 결과는 천만다행이었다.
치료하기 어려운 췌장암이었지만 수술로 고칠 수 있는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때의 감격이 떠올랐는지 잡스는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고 학생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편안하게 무대에 오른 그이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학생들에게 이 날만큼은 잡스가 영웅이었고 스타였다.
2005년 10월3일
영국 BBC방송이 뽑은 ‘세계 지도자 베스트 11’에 올랐다. 세계적 지도자와 사상가, 기업인 100여 명을 인터넷에 공개해 1만5천여 명의 네티즌 투표로 이뤄진 이번 조사에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1위에 올랐고 스티브 잡스는 7위로 MS 빌 게이츠 회장(6위)의 뒤를 따랐다.
2007년 1월9일 아이폰 출시
맥월드 컨퍼런스에서 소문만 무성하던 아이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6월 미국 시장에 출시될 아이폰은 2008년 아시아와 유럽에 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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